[2021 시필사. 53일 차]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어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서로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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