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Record). 이것은 음악이 녹음된 매체, 즉 CD나 LP나 카세트를 의미하는 말로 오랫동안 쓰였다.
지금은 음악 녹음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앨범’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영예가 ‘올해의 레코드’이기도 하다. 레코드는 리코드(Record), 즉 동사로는 ‘기록하다’와 겹친다. 녹음이기 이전에 기록이란 말이다. 우리가 지금 배우고 익히며 이해하고 있는 세계 음악사는 대개 ‘기록된’ 것들이다. 기록되지 못한 것들은 뿌연 안개처럼 모호하게 추정될 뿐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비틀스,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명징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서양음악사에서 최초의 유명 작곡가로 기록된 인물은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이다. 가톨릭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원장이자 과학자, 철학가, 의사, 시인, 그리고 작곡가로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5000년 인류 역사에서 왜 앞 4000여 년 동안의 위대한 음악가 이름은 누락되고 없을까. 저 유명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장식한 신 스틸러, 동물 뼈 때리던 선사 인류라고 음악적 천재를 가진 자가 전무했을까. 문제는 첫째도 기록, 둘째도 기록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폰 빙엔 수녀원장님은 앞서 무명씨로 영영 묻힌 천재 작곡가 선배들에 비해 시대를 타고나도 너무 잘 타고났다. 10세기에 음높이를 표시하는 초기 오선보가 등장했다. 11세기에는 ‘도~레~미~’로 알려진 계명창과 악보 읽기가 발달했다. 12세기에 활동한 폰 빙엔은 이런 기록의 힘에 의해 기록됐다. 동그란 레코드는 없었지만 악보라는 레코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는 박자와 마디를 나누는 정량(定量) 기보법이 등장하면서 다성음악이 발달했다. 폰 빙엔은 단선율 작곡가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제 흥얼거리며 멜로디나 짓는, 요즘 말로 하면 ‘톱라이너(Topliner)’의 시대는 갔다. 입체적 작·편곡을 하는 천재적 작곡가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특이점은 15세기 중반에 열린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나온 것이다. 재능 있는 작곡가가 기록한 악보를 소수만이 어렵게 필사해 돌려보던 시절이여, 안녕. 인쇄술 발달은 악보의 대량 복제를 가능케 했다. 동네의 수재, 지역의 천재는 국경을 넘어 입소문이 아니라 기록으로, 레코드(Record)로 전파됐다. 16세기에 최초의 상업적 악보 출판이 시작됐고, 18세기에는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가 출현한다. 그 이름도, 초상화도 카리스마 넘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음악가는 교회나 궁정에 소속돼 녹을 받지 않고도 자기가 펼치고픈 음악 세계를 펼치면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귀족이 전유하던 고급문화 향유가 중산층의 성장으로 더 많은 대중에게 가능해지자 천재적 음악가들은 신에게, 귀족에게 바치던 작품을 대중에게 바치기 시작한다. 짝사랑, 외사랑, 망한 사랑의 귀재 베토벤은 여자 친구들에게 바치기도 했다.(‘엘리제를 위하여’를 보라!)
“메리한테는 어린 양 한 마리 있었죠 / 털은 눈처럼 새하얬지요 / 메리가 가는 곳이면 / 어디든 따라다녔지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한 남자가 미묘하게 격앙된 음조로 동시 한 수를 읊는다. 이 녹음이 남아 있음에, 주여, 감사를…. 날짜는 1877년 8월 12일. 베토벤 사후 50년이 되던 해였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다. 온갖 신문물의 발명자였던 에디슨은 저날, 대단한 발견을 하고 이를 발명으로 이어 간다. 전보 발신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연구를 하던 중이었다. 기계의 기록장치를 빠른 속도로 돌리자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것은, 설마, 혹시…!’ 에디슨에게 특유의 촉이 왔다. 전화 수신기에 달린 얇은 막에 바늘을 부착했다. 바늘을 은박 원통(실린더)에 연결했다. 그리고 수화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보기로 했다. 그냥 그 순간에 막 떠오른 동시. 우리로 치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쯤 되는,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박혀 있는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Mary Had a Little Lamb(메리에겐 어린 양 한 마리 있었지)’이라는 동시다.
에디슨의 바늘, 실린더가 가져온 후폭풍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87년에는 또 다른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가 ‘그래머폰’을 발명했다. 에디슨의 ‘포노그래프’가 원통형 실린더였다면, 그래머폰은 얇은 원반 형태였다. 이 디스크형 레코드는 에디슨의 실린더를 포맷 전쟁에서 이기고 결국 훗날 LP, CD까지 이어지게 된다.
디스크형 레코드가 대중화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에 레코드를 대체해 음악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수많은 매체가 명멸했다. 1896년에는 자동 연주 피아노, 피아놀라가 출시돼 방방곡곡의 카페와 바에 설치돼 최고의 나날을 보냈다. 1925년 전기 증폭 녹음 기술이 대중화하고, 1928년에는 독일에서 마그네틱 테이프가 개발되면서 레코드 기술은 날개를 달았다. 1948년, 콜럼비아 레코드가 마침내 1분에 33과 3분의 1회 회전하는 12인치 LP를 개발한다. 1960년대에는 스테레오 레코드가 대중화하고, 1982년에는 필립스사가 CD를 개발한다.
수녀원장 폰 빙엔의 시대에서 불과 800여 년이 흐른 20세기에 음악 기록 매체는 폭발적인 속도로 특이점 너머 특이점, 그 특이점 너머 특이점을 계속해 써 나가면서 지평을 확장한 것이다. 1999년, 디지털 음원 공유 사이트인 ‘냅스터’가 론칭했고, 2001년에는 애플사에서 아이튠스를 출시했으며, 2006년에는 스웨덴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가 출시되기에 이른다.
레코드의 발달이 소비의 확대나 청취의 편리성만 확대시킨 것은 아니다. 생산자의 무한 확장도 이뤄 냈다. 소수의 엘리트에 집중된 음악가의 길은 이제 광야로 넓어진 것이다. 1983년 MIDI(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출현했다. 이제 악기 하나 못 다루는 사람도 미리 기록된 악기 소리를 조합해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1996년 DJ 섀도의 앨범 「Endtroducing.....」은 최초의 100퍼센트 샘플링 음반이었다. 새 음반에 새로운 연주는 단 한 음도 없었다. 직접 수집한 바이닐 레코드에서 뽑아낸 음원을 조합해 섞어 낸 이 앨범은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기념비적 음반으로 자리매김했다. 레코드로 만든 레코드인 셈이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떠도는, 누군가 만들어 올려 놓은 반주 트랙에 본인이 멜로디만 덧입혀서 쇼트폼 플랫폼의 바이럴을 타고 반짝스타가 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2020년대식의 톱라이너 스타, 단선율의 고전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Z세대 버전이라고 할까.
레코드는, 아니,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레코드는 기록이며 기록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간다. 인공지능 기술이 창작과 예술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는 AI의 시대에 레코드는 또 어떤 형태로, 어떤 예술가들을 만들어 낼까. 폰 빙엔, 베토벤, DJ 섀도를 이어갈 세계 음악 예술가의 계보는 어쩌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레코드를 기다린다.
글. 임희윤
기자·평론가. 국악·대중음악·클래식·영화음악을 두루 다룬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몸속에 꿈틀대는 바이킹과 도깨비를 느낀다.
https://www.ntok.go.kr/Community/Webzine/Details?articleId=204127&chapterId=51181
기록(레코드)이라는 음악 저장 방식의 발전에 따라 음악의 역사를 너무 재미있게 풀어낸 글이 있어서 소개한다.
미디, 가상 악기, 샘플링, 플러그인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ITB 믹싱과 홈레코딩, 국경을 뛰어 넘는 케이팝 스타일의 공동 창작, 장소의 제약 없는 온라인 협업...
그리고 이제 AI의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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