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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필사 & 시낭독680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2021 시필사. 173일 차]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청파동을기억하는.. 2021. 7. 15.
분다 - 정다인 [2021 시필사. 172일 차] 분다 - 정다인 당신의 뒷모습은 바람의 탁본이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역류의 시발점, 바람이 분다 신탁도 없이 웃자란 생의 비의를 끌어안고 당신이 쓸쓸하게 웃을 때 후우, 바람이 분다 미처 여미지 못한 옷깃에서, 헝클어져 엉킨 머릿결에서 숨결보다 얕은 바람이 인다 당신이라는 말, 불러 세울 수 없는 먼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순간들이 모여 세상은 더 낯선 곳으로 흘러간다 당신과 나의 서먹한 저녁이 수저 소리도 없이 어두워지면 길 위에선 또 다른 당신이 바지춤을 추스른다 스쳐 가는 뒷모습은 겹쳐지고 또 겹쳐져 문풍지처럼 떨리고, 당신은 그을음처럼 가라앉는다 한때 불꽃을 가졌으므로 당신과 나는 생살을 주고받은 사이, 널름거리던 화염 속에서 우리의 뒷모습은 뜨거웠을.. 2021. 7. 13.
결국 - 이응준 [2021 시필사. 171일 차] 결국 - 이응준 당신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다. 이러한 나를 당신이 모른다면 결국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람에 외롭고 세상에 시달리고 어둠에 죽고 싶었던 날들을 기억하지만, 그래도 그 숱한 밤들이 항상 지옥만이 아니라 간혹 추억인 것은, 내가 불구덩이 속에서도 나의 마음을 찾아 헤매다 결국 당신을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에 외롭고 세상에 시달리고 어둠에 죽고 싶었던 날들이여. 이러한 나를 당신이 모른다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결국 #이응준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23.
먼 여름 - 이성호 [2021 시필사. 170일 차] 먼 여름 - 이성호 아무리 채찍질해도 닿을 수 없는 벼랑처럼 아스라한 그대여 내 마음에 무수히 살면서도 도무지 삶이 되지 않는 어떤 꽃처럼 먹먹한 그대여 #먼여름 #이성호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20.
느린 여름 - 신해욱 [2021 시필사. 169일 차] 느린 여름 - 신해욱 맑고도 무거운 날이었다 그는 쓱 웃으며 나의 한 쪽 어깨를 지웠다 햇빛이 나를 힘주어 눌렀고 그를 벗어나는 자세로만 나는 그에게로 기울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시간이란 이제 다시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쓱 웃으며 나를 나의 의미를 미리 지워버렸다 #느린여름 #신해욱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19.
먼지가 보이는 아침 - 김소연 [2021 시필사. 168일 차] 먼지가 보이는 아침 - 김소연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 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 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 나는 나대로 극락조는 극락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먼지가보이는아침 #김소연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19.
누구에게나 지독한 저녁 - 박연준 [2021 시필사. 167일 차] 누구에게나 지독한 저녁 - 박연준 누군가 좋아지면 도망가고 싶어요 뒤를 모르는 곳으로 코와 눈만 겨우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 아니,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당신과 나 사이 겹벚꽃나무와 층층나무, 봄이라는 모호한 전쟁 당신과 나 사이 건널 수 없는 다리들 전깃줄을 타고 빛으로 갈까요 (((도망))) 가죠, 얼굴이 그물이 되어 얼굴을 낚고, 잡히지 않고 싶어요 말한 후 잡히면, 알게 되는 옥상, 알게 되는 응달, 알게 되는 미래, 알게 되는 이름표, 저녁은 흐리멍덩하게 오죠 그게 문제예요 주머니가 없는 사람 당신은 무엇도 담지 못하는 사람 빗방울도 어린 꽃잎도 처음 세상에 내려오는 눈송이도 당신을 스쳐 가죠 사랑의 앞발이 비밀을 하나둘 거둬 갈 때, 야울야울 타는 저녁 창 .. 2021. 6. 18.
흐름에 대하여 - 문정희 [2021 시필사. 166일 차] 흐름에 대하여 - 문정희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참으로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의 숨결로 키워낸 진주는 왜 슬픔처럼 영롱한 것인지 알고 싶다. 하늘은 왜 우리에게 햇살과 함께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들은 왜 흐르는가.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지 못하고 날개가 되지 못하고 왜 약속처럼 산으로 가는가. 산으로 가는가. 한 번 죽음으로 자유와 햇살 빼앗기고 다만 혼자 제 목숨 갖고 가는가. #흐름에대하여 #문정희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18.
오늘의 약속 - 나태주 [2021 시필사. 165일 차] 오늘의 약속 -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 2021.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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